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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 gloomy birthday

민자 씨는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새끼들에게 넉넉히 차비를 쥐어 주고, 학교 끝나면 친구들하고 붕어빵이라도 사 먹으라며 얼마 안 되는 용돈이라도 쥐어 주고 명절을 앞두고는 새 옷은 못 사줄 망정 새 양말이라도 한 짝씩 사주는 자신의 모습을 소환해 내고 싶었다. 그러나 기억이 하나씩 떠오를수록 민자 씨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이들의 증언대로 그녀의 기억 속에도 너그러운 민자 씨는 존재하지 않았다. 스케치북을 사야 한다는 셋째의 말에 "언니한테 빌려서 가! "라고 말하는 무뚝뚝한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고, 소풍을 가는 아이들의 김밥 재료를 사면서 소시지를 집었다가 도로 내려놓는 소심한 모습이 떠올랐고, 과일장사를 하면서도 아이들에게는 늘 상품가치가 떨어진 시든 과일만 먹이는 인색한 ..

단편 소설 2024.09.10

3. a gloomy birthday

" 누나는 혼자 온 거야? " 민자 씨의 아들이 혼자 들어오는 둘째 누나를 보며 물었다. " 그래. 네 매형도 오늘 일이 늦게 끝난다고 그러고 애들도 바쁘다고 해서 말이지. 나도 사실 오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과장한테 양해를 구하고 겨우 왔다. " " 형님~ 먼 길 오느라 애 쓰셨어용." 민자 씨의 며느리가 애교 섞인 인사를 건넸고 어쨌든 올 사람은 다 온 거니까 시작하자는 큰 사위의 말에 민자 씨의 아들이 성냥을 긋고 케잌에 꽂힌 초에 불을 붙였다. " 여기 고기 좋다~ 큰 언니가 예약한 거지? " 막내딸이 묻고 " 응. 네 형부랑 전에 한번 왔었는데 괜찮길래~ 엄마도 소고기 좋아하니까.." 큰 딸이 대답했다.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며 평소에도 장난기가 많은 둘째가 말했다. " 좋은 고기를 보니 눈물이..

단편 소설 2024.09.10

2. a gloomy birthday

그렇게 남편을 보내고 민자 씨는 졸지에 애 넷 딸린 과부가 됐다. 남편 없이 혼자서 연탄가게를 계속해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연탄가게를 정리하고 집 가까운 곳에 자그맣게 과일 가게를 열었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도매시장에 직접 나가 과일을 사다 팔았다.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 있는 가게라서 쏠쏠하게 장사가 됐다. 그렇게 고생해 아이 넷을 키웠다. 대학은 못 보냈지만, 고등학교까지는 다 보낸 것 만도 대단한 일이라고 민자 씨 스스로 자부했다. 딸들은 여상(실업고등학교)을 졸업해 각자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들을 했다. 세 딸들 결혼시킬 때 수저 한벌도 해주지 못한 게 조금은 미안했지만, 그만큼 키워 놓았으니 내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생각하는 민자 씨였다. 시원하게 때를 밀고 나온 민자 씨는 주전자 가득 끓..

단편 소설 2024.09.09

1. a gloomy birthday

민자 씨는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나흘 전부터 오늘을 고대하고 있었다. 오늘은 79번째 맞는 민자 씨의 생일이고 세 딸과 아들네 식구들까지 모두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총출동하는 날이기도 했다. 가볍게 샤워를 할까 하다가 개운하게 때를 밀어야겠다고 생각한 민자 씨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그 소금이 어디 있더라?" 첫째 딸이 얼마 전에 사다 놓은 히말라야 입욕 소금을 떠올린 민자 씨는 욕실 수납장 안쪽에서 그것을 찾아 절반쯤 차 오른 목욕물에 한 주먹을 넣고 휘휘 저었다. 옷을 벗어 차곡차곡 접어 욕실 문 앞에 있는 빈 수건 바구니에 담아 놓고 민자 씨는 천천히 욕조에 몸을 담갔다. " 식사는 저녁 6시로 잡았는데 엄마도 괜찮지? 엄마 좋아하는 소고기 ..

단편 소설 2024.09.09

희동이의 낚싯대

희동이를 만난 지 1년이 되어간다. 남편이 운영하던 카페의 뒷동산에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주먹만 한 희동이를 처음 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 고양이가 함께 있었는데 초겨울이 되고 우리 가족이 카페를 그만둘 때가 되자 엄마 고양이가 홀연히 사라졌다. 엄마와 함께 있는 희동이 ㅠㅠ 남겨진 희동이를 집으로 데려오기로 결정했지만, 사람 손을 타본 적이 없는 야생 새끼 고양이를 과연 어떻게 잡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일단 츄르를 좀 사고 긴 막대 끝에 깃털이 달린 고양이 낚시 장난감을 사서 희동이를 유인하기로 했다. 딸아이가 인내심을 갖고 며칠간 츄르를 사료그릇에 짜주고 장난감으로 놀아주던 어느 날 드디어 희동이를 잡는데 성공은 했지만, 느닷없이 케이지에 실려 낯선 공간에 오게 된 희동이는 꽤 오랫..

그리고...

휴무인 오늘 아침은 알람을 해제해 놓고 10시 반이 넘도록 늦잠을 잤다. 밤 사이 우리 집 동물들이 협소한 내 등짝을 도움닫기 삼아 침대 위를 날라 다니고, 할짝할짝 물을 먹고 오도독 거리며 사료를 먹는 소리를 모두 들으며 가수면 상태로 자다가 새벽녘쯤 이 녀석들이 놀다 지쳐 잠들 때에 맞춰 나도 숙면에 들어갔다. 방 문 앞에 울타리를 세워놓고 방으로 통하는 베란다 통로에도 높은 수납형 의자를 놓았지만, 높이뛰기 선수인 녀석들을 막기는 쉽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그 일로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 수면의 질보다 콩이, 연이, 희동이가 소중하니까. 집안이 어두운걸 보니 비가 올 모양이다. 쉬는 날에 내리는 비라니, 너무 좋잖아~ 캐비넷을 열어 안성탕면을 꺼내고 달걀한알을 가져와 라면을 ..

일상 이야기 2024.09.05

세 자매의 오션월드 후기

얼마 전 친자매들과 오션월드를 다녀왔다. 여름휴가가 없는 내 처지 때문에 가까운 곳에서 당일치기 물놀이라도 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세 자매 중 가장 어린 (어려도 50대^^) 여동생의 추천으로 가게 되었다. 오션월드에서 가장 먼 곳에 사는 나는 새벽 6시에 기상해 전날 대충 싸놓은 짐가방을 들고 언니와 동생을 픽업해 홍천 비발디파크로 향했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 함께 가보고 얼마 만에 가보는 워터파크인가.. 솔직히 그때만큼의 기대는 생기지 않았지만, 재미나게 즐기고 오겠다는 각오를 장착하고 나니 구명조끼를 받으면서 살짝 설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일단 몸풀기로 슈퍼익스트림리버에서 튜브를 타고 파도를 따라 출발했다. 내 체구에 맞는 제일 작은 노란색 튜브를 타고 둥실둥실 사람들과 부딪히며 돌기를 여러 ..

일상 이야기 2024.09.01

여름과 가을 사이

폭염으로 꽤나 힘들었던 여름이었다. 과거형으로 말하기엔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이틀 전쯤부터 아침, 저녁으로 시원해지는 걸 보니 끈적이던 여름이 손 흔들며 저만치 떠나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계절이 바뀌기 시작할 때의 소소한 변화를 좋아한다. 예를 들면, 겨울이 시작될 때엔 낙엽이 타는 듯한 매캐한 냄새 같은 걸 느끼곤 하는데 나는 그걸 겨울의 냄새라고 믿는다. 어쩌면 먼 곳에서 그즈음 실제로 낙엽을 태우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해마다 그 냄새를 맡곤 한다. 계절이 바뀔 때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의 각도가 달라지고 습도가 달라지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미세하게 달라진다. 불과 며칠 전까지도 들렸던 요란한 매미소리는 어느새 온데간데없고 풀벌레소리가 고요한 아파트 단지에 가득하다. 갱년기 불면증으로 쉽게 ..

일상 이야기 2024.08.29

말괄량이 삐삐

내가 초등학생 (그때는 국민학교) 일 때 kbs에서 말괄량이 삐삐라는 13부작 외화가 방영 됐다. 첫 회부터 삐삐롱스타킹에 매료된 나는 삐삐가 방송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삐삐의 광팬이었다. 너무 오래전에 본 거라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대략 설명을 하자면 삐삐의 붉은색 머리카락은 양갈래로 땋아져 양쪽으로 뻗어 있고 장난기 가득한 귀여운 얼굴은 온통 까만 주근깨로 덮여 있었다. 삐삐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원숭이와 달마시안 같이 점박이가 있는 하얀 말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천을 잘라 옷을 만들어 입거나 요리를 직접 하기도 하고, 금화가 가득 들어 있는 큰 가방을 가지고 다녔다. 해적인 삐삐의 아빠는 바다에 나가 실종 됐는데 거의 마지막쯤에 아빠를 만났던 걸로 기억된다. 사탕가게 앞에서 군침을 흘..

일상 이야기 2024.08.14

안녕, 오벳?

2년전쯤 구제 의류를 분류하고 포장하는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일을 하게 된 이유는 전에 해보지 않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어서였는데, 일본에서 수입해 온 구제의류(중고의류)를 종류별, 등급별로 나누어 다림질을 하고 가격표를 붙여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다시 판매하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헌옷들을 만지는 일이다보니 기본적으로 깨끗한 환경이 아니었고 커다란 컨테이너 박스가 작업장이라서 거의 바깥의 기온과 차이가 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해야했다. 사업장은 꽤 커서 사장을 제외한 직원이 10명 정도 됐는데, 외국인 두 명이 포함 되어 있었다. 힘을 써야 하는 일들을 거의 도맡아 하던 오벳이라는 청년은 서아프리카의 가나에서 온 30대 중반의 성실하고 조용한 친구였는데, 한국말이 서툴렀지만 나와는 ..

일상 이야기 2024.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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