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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반대말

점심 설거지를 하려고 노란 고무장갑을 끼다가 왼쪽 장갑의 가운데 손가락 부분이 1센티쯤 찢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아마도 어제저녁 꽃게를 손질하면서 찢긴 듯하다.생활용품을 넣어 둔 붙박이장을 열고 이번엔 민트색 고무장갑을 꺼낸다. 나는 똑같은 색깔의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싫증이 나서다.다양한 컬러의 고무장갑을 골고루 사놓고 돌아가면서 쓴다.그것은 내게는 일종의 기분전환이고 작은 행복으로 작용한다.내친김에 오렌지와 빨간색이 섞인 실수세미도 바꾸기로 한다. 가운데 동그라미는 하얗고 테두리로 갈수록 파란색 그라데이션이 된 여동생이 떠 준 수세미다. 새 장갑과 새 수세미로 하는 설거지는 노동이 아니다. 즐거움이다.그릇들을 깨끗이 헹구면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떠올려본다.마트에서 사 온 고구마를 ..

일상 이야기 2026.10.16

집사는 괴로워.

하늘에 연회색 구름이 잔뜩 낀 후덥지근한 월요일 오후.바구니에 가득 찬 옷가지들과 오전에 걷어 놓은 소파 커버와 쿠션들을 세탁하느라 오늘만 벌써 세탁기를 세 번째 돌리고 있다.뜨끈뜨끈한 마른빨래들을 꺼내 안방 침대 위에 가져다 놓고, 막 세탁된 젖은 빨래들을 건조기로 옮기고, 워싱소다와 퍼실을 적당히 섞어 새 빨랫감에 붓고 세탁기 전원버튼을 누른다.건조기와 세탁기가 경쟁이라도 하듯 윙윙대며 돌아가는 소리 때문일까.뭔지 모르게 더 부산스러운 느낌이다.이번 주는 내가 공부하고 있는 세종사이버대학교의 중간고사 기간이다.시험 봐야 할 다섯 과목의 교안을 정리해 놓은 파일 무게만도 족히 3킬로 될 듯싶다.일단 모레로 잡힌 의 두툼 한 교안을 꺼내 놓고 공부를 시작한다.빨간 사인펜으로 중요해 보이는 것에 동그라미나..

Saturday

아울렛에 왔다. 쇼핑을 하러 온 것은 아니고 푸드코트에 주말 알바를 하러 나왔다. 출근한 지 3시간 만에, 한 시간 휴게시간을 얻어 쉬러 가는 길.주차장은 들어가고 나가는 많은 차들과 사람들로 인산 인해 상태이다.저 많은 시람들은 다 어디서 왔을까...저들도 나를 보며 생각할 테지. 저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어두운 차 뒷좌석에 몸을 반쯤 뉘이고 바나나와 단백질 음료를 먹는다. 우물우물 쩝쩝.마주 보이는 빈자리에 검은색 아우디 차량 한 대가 후진 주차로 들어간다.털이 북실거리는 갈색 포메를 안은 여자가 먼저 내리고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이어 내리면서 트렁크에서 개모차를 끄집어내어 펼친다.아주 흔한 풍경이다.귀엽게 생긴 포메의 목에서 금빛 목걸이가 반짝 거린다. 아.. 나도 없는 금목걸이.,목걸..

일상 이야기 2026.10.10

가을의 증거

커튼을 바꾼다.거실의 하얀 시폰 여름 커튼은 폼폼 태슬이 달린 샛노란색 커튼으로.여름 실로 엉성하게 짜인 내 방의 커튼은 갈색과 흰색이 교차된 깅엄 체크 커튼으로.그것 하나 바꾼 거뿐인데 집안 전체가 달라진 느낌이다. 베란다에 내놓았던 2인용 소파를 안으로 옮길까 하다가 말았다.콩이가 한낮 동안 일광욕을 즐기는 공간.굳이 변화를 줄 이유가 없다.바닥 공사를 한다던 201호 덕분에 오전 내내 굉음에 몸서리를 쳤는데, 공사하는 사람들이 식사를 하러 간 걸까?소음이 멈추었다.붕붕붕 떠있던 불안이 공중을 날다가 차츰 가라앉는 먼지들처럼 조용히 내려앉는다.블루투스를 켜고 오랜만에 재즈를 듣는다.여름내 열어 두었던 창문을 하나, 둘 닫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더 높아진 건가? 더 파래진건가? 사실 잘 모르겠다.하지만..

횡단보도 앞에서

선크림을 고루 펴 바르고 과하지 않은 옅은 립스틱으로 칙칙한 입술에 약간의 혈색을 부여하고서 여름내 신었던 헐렁한 샌들 대신 오랜만에 운동화를 꺼내 신고 집을 나선다.집 앞 큰 도로에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던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어느새 나뭇잎이 제법 떨어져 뒹굴고 있다.나도 예외 없이 어마어마하게 끓어오르던 계절을 지나온 것이 분명한데 왜 내 기억은 여름을 건너뛰려 하는 건지 잠시 난감한 기분이 된다.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을 보며 걷다가 횡단보도 근처에서 멈춘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아직은 따가운 햇살을 피해 가까운 나무 아래 그늘에 서 있다가 내 옆을 지나 횡단보도로 다가가는 한 아주머니를 본다. 흰 머리카락이 많이 섞인 짧은 커트 머리에 다소 어두워 ..

일상 이야기 2026.09.17

영화 "호프"

"영화 보러 갈까?"남편이 묻는다."제목이 뭔대?"내가 묻는다."호프."호프.? 생맥주 영화는 아닐거고 Hope 인가?양동이만한 캬라멜 팝콘과 라지사이즈 콜라를 들고 영화관에 들어 가기 전까지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고작 조인정,황정민이 출연한다는 거 뿐.영화가 시작되고 죽은 소가 나오고 동네가 불 타고 사람이 죽고..인트로가 좀 길다는 생각을 하면서 대체 뭐가 나오려고 이러지? 할 즈음.와우~~~상상하지 못한! 깜짝 놀랄만한 괴물(?)이 등장한다.그때부터 시작되는 숨 막히는 긴장감과 스릴.이거 우리나라 영화 맞아?신박한 소재다.새롭다.제법 긴 상영시간이 끝나고 후속편을 예측하게 하는 엔딩이 끝나고, 빈 팝콘용기를 들고 영화관 계단을 내려간다. "Hope" 내 개인적인 의견은.. 재밌다. 흥미롭다.왠..

일상 이야기 2026.07.18

반려개미

어느 날부턴가 베란다에 개미가 보였다.깨알같이 작고 까만 개미 한두 마리가 며칠 뒤엔 대여섯 마리가 되었고 매일 그 숫자가 조금씩 늘어나는 거 같았다. 친한 언니에게 화분에서 개미가 나오는 거 같다고 얘기하니 화분의 흙을 몽땅 버려야 할 거라고 했다. 안 그러면 나중엔 개미가 방에도 들어올 거라고 했다.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은 베란다에 나갈 때마다 눈에 띄는 작고 하찮아 보이는 개미들을 부직포 먼지떨이에 붙여 창밖으로 후후 불어 날려버리기만 했었다. 내가 날려 보낸 개미들이 낯설고 넓은 세상에서 자리 잡고 살아가긴 힘들 거라고 생각됐지만, 밟아 죽이거나 물에 떠내려 보내는 거보다는 그게 마음이 편했다.개미들이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게 어디론가 날아갈 때마다 속으로 잘 가~인사를 하곤 했는데 그것 때문이었..

아빠의 일기

카톡으로 온 사진 두 장.여동생이, 돌아가신 아빠의 유품 중 하나였던 낡은 다이어리 중 일부를 찍어 보내왔다.친정집에 보관돼 있던 것을 몇 년 전 가져간 동생이 아빠가 써놓은 71년도 어느 날의 일기를 들여다보다가 글씨도 알아보기 어렵고 한문이 많이 섞여 있어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어서 사진으로 내게 보낸다고 했다. 변색된 낡은 종이엔 박력 넘치는 필체로 빼곡히 적어 내려간 아빠의 하루가 적혀 있었다.일기의 제목은 兄弟(형제).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날 아빠는 작은 아빠에게 돈을 빌리러 가셨나 보다. 천천히 글자를 확대해서 읽어보니, 대학을 졸업하고 갓 대기업에 취직한 동생에게 힘이 되어 주지도 못하고 오히려 돈을 빌리러 가는 형으로서의 무거운 마음과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을 자책하는..

일상 이야기 2026.07.05

화는 습관이다.

유난히 힘들었던 오늘의 산책.두 걸음 가다 말고 돌아서 거꾸로 다섯 걸음 가고,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안아달라고 조르는 청개구리 같은 연이를 보며 괜히 어금니를 꽉 깨물게 되고, 콩이는 왼쪽에서 당기고 연이는 오른쪽에서 당겨 길 한복판에서 양팔을 활짝 벌리고 오도 가도 못하는 웃긴 상황도 오늘따라 하나도 즐겁지가 않고, 하다못해 산책로 곳곳에 심어진 가시나무들이 갑자기 꼴 보기가 싫고.아놔~ 아이들이 자전거 타다가 뾰족한 가시 위로 넘어지거나 강아지들이 킁킁 냄새 맡다가 눈이라도 찔리면 어떡하려고? 이거 이거 공원 관리자를 불러~말어!시청에 민원전화를 걸어~말어!생각해 본다.오늘 나는 왜 이리 심기가 불편하지?콩이와 연이가 평소 안 하던 짓을 한 것이 있나?이 길의 섬뜩한 가시나무들이 어제는..

평화를 원해!

고양이와 개를 같이 키운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 둘이 서로 잘 지내는지를 많이 묻곤 한다.내 대답은 늘 똑같은데,"잘 지내기도 하고 잘 싸우기도 해요."이다.잘 지내는 전자는 콩이와 희동이고 잘 싸우는 후자는 연이와 희동이다.연이는 평소에도 조금 까칠한 면이 있지만 유난히 희동이에게는 거칠다.마치 어떤 임무라도 부여받은 사냥꾼처럼 종일 희동이의 행적을 추적하기 바쁘다.희동이를 감시하는 연이를 제재하긴 하지만, 어느 틈엔가 방심한 희동이의 보드라운 갈색털 한 움큼을 뜯어 입에 물고 나타나기도 한다.아마도 희동이는 캣타워에서 무심히 뛰어 내려오거나 침대 밑에서 노곤하게 기지개를 켜며 나오다가 연이의 재빠른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물고 있는 제법 많은 털을 보고 놀라 꺄아악~소리라도 지를 때면 연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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