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11

가을예찬

가을비가 내리는 평온한 화요일. 딸아이가 만들어 준 딤섬으로 맛있는 점심을 먹고 구수한 작두콩 차를 마신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짙은 갈색 차는 가을과 많이 닮아있다. 로즈메리오일을 서너 방울 떨어뜨린 오일버너에 초를 켜고 멀찍이 앉아 노랗게 반짝이는 촛불을 본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창밖의 잔뜩 흐린 회색 하늘과, 베란다 난간에 매달린 작은 빗방울들과,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거실을 돌아다니는 강아지들의 씰룩이는 엉덩이를 바라보는 지금. 완벽한 행복을 느끼는 시간이다.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이 고즈넉하고 아늑한 정서가 참 좋다. 이 가을이 오래 좀 머물러줬으면...

일상 이야기 2024.10.22

그리고...

휴무인 오늘 아침은 알람을 해제해 놓고 10시 반이 넘도록 늦잠을 잤다. 밤 사이 우리 집 동물들이 협소한 내 등짝을 도움닫기 삼아 침대 위를 날라 다니고, 할짝할짝 물을 먹고 오도독 거리며 사료를 먹는 소리를 모두 들으며 가수면 상태로 자다가 새벽녘쯤 이 녀석들이 놀다 지쳐 잠들 때에 맞춰 나도 숙면에 들어갔다. 방 문 앞에 울타리를 세워놓고 방으로 통하는 베란다 통로에도 높은 수납형 의자를 놓았지만, 높이뛰기 선수인 녀석들을 막기는 쉽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그 일로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 수면의 질보다 콩이, 연이, 희동이가 소중하니까. 집안이 어두운걸 보니 비가 올 모양이다. 쉬는 날에 내리는 비라니, 너무 좋잖아~ 캐비넷을 열어 안성탕면을 꺼내고 달걀한알을 가져와 라면을 ..

일상 이야기 2024.09.05

여름과 가을 사이

폭염으로 꽤나 힘들었던 여름이었다. 과거형으로 말하기엔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이틀 전쯤부터 아침, 저녁으로 시원해지는 걸 보니 끈적이던 여름이 손 흔들며 저만치 떠나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계절이 바뀌기 시작할 때의 소소한 변화를 좋아한다. 예를 들면, 겨울이 시작될 때엔 낙엽이 타는 듯한 매캐한 냄새 같은 걸 느끼곤 하는데 나는 그걸 겨울의 냄새라고 믿는다. 어쩌면 먼 곳에서 그즈음 실제로 낙엽을 태우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해마다 그 냄새를 맡곤 한다. 계절이 바뀔 때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의 각도가 달라지고 습도가 달라지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미세하게 달라진다. 불과 며칠 전까지도 들렸던 요란한 매미소리는 어느새 온데간데없고 풀벌레소리가 고요한 아파트 단지에 가득하다. 갱년기 불면증으로 쉽게 ..

일상 이야기 2024.08.29

지금은~

휴가철의 절정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아울렛은 피서를 떠나기 전 위시 리스트를 충족 시키려는 사람들로 연일 북적인다. 전월 대비 매출이 크게 상승하고 일의 강도도 그에 비례 하고 있다. 주어진 급여의 월급쟁이들은 이런 매출상승이 그닥 달갑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지만, 한가로운 날들도 있었으니 비지땀 흘려가며 일에 몰두 해야 할 시간 또한 불가피하다. 나도 예전에는 휴가철인 이 때를 손꼽아 기다리고, 빠뜨린 것이 없는지 메모지를 체크 해가며 여행 가방을 싸고, 차가 밀릴 시간을 피한답시고 이른 아침부터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워 푸른 바다가 있는 피서지로 떠나곤 했다. 맨발로 디딜수도 없는 뜨거운 모래사장에 텐트를 치고 보글보글 캠핑찌게를 끓이고 코펠에 지은 설익은 밥을 먹으면서도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물에서..

일상 이야기 2024.08.06

거미꿈

나는 잠을 자는 동안 계속 꿈을 꾸고 아침에 깨어나서도 간밤의 꿈들을 거의 기억 한다. 그만큼 숙면 하지 못해 피로가 쌓이기는 하지만, 신비로운 꿈도 많이 꾸기 때문에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재밌는 영상을 보는 느낌이 들 때도 많다. 어젯밤에는 내 방 사방에 거미줄이 처지고 큰 거미들이 벽마다 붙어 버티고 있는 꿈을 꾸었다. 거미가 지키고 있는 방문을 지나는 게 무서워서 방 밖으로 나가질 못하고 덜덜 떠는 요상한 꿈이었다. 꿈을 많이 꾸다 보니 확률상 예지몽을 꾸는 경우도 많다. 꿈에서 일어난 일들이 현실에 일어나는 경험을 여러번 했다. 그런 일이 생길때면, 이러다가 신내림이라도 받게 되는 거 아닌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대수롭지 않은 수준의 예지몽들이다. 거미줄과 거미의 꿈은 무슨 의미일까..

일상 이야기 2024.07.26

happiness

빗방울이 약하게 떨어지는 토요일의 점심시간.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마신다. 장마는 잠시 소강 상태였다가 오후부터 다시 비가 예보되어 있다. 며칠간 흠뻑 비를 맞은 싱그러운 나무들은 살랑이는 바람에 기분 좋은 듯 잎을 흔들고 힙한 음악이 아울렛을 가득 울린다. 카메라를 켜게 만드는 예쁜 조경 사이를 걸으며 여유롭게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 신이 난 아이들을 태우고 천천히 다리를 건너는 알록달록 꼬마기차. 십수년의 유충생활을 청산하고 깨어난 매미들의 우렁찬 합창. 일로 치면 평소의 몇 배로 바쁘지만, 활력 넘치는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즐거운 토요일이다.

일상 이야기 2024.07.20

Rain

장맛비가 무섭게 퍼붓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잘 때처럼 행복할 때가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해가 쨍한 날보다 비나 눈이 내리거나 흐린 날씨를 좋아합니다. 밤새 비가 꽤나 내리는 거 같았습니다. 천둥소리를 무서워하는 우리집 강아지 연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저는 아침까지 과격한 빗소리를 들을수 있어 참 좋더군요. 출근 길.. 역시나 비가 옵니다. 와이퍼가 지나간 자리에 일렁이는 파도를 닮은 빗물이 있어 핸드폰으로 찍어 봅니다. 이틀을 쉬고 나서 출근하려니 몸도 맘도 찌뿌둥 하지만, 오늘도 씩씩하게 일하러 갑니다.

일상 이야기 2024.07.17

Again a Saturday

다시 돌아온 토요일의 점심시간. 유부초밥으로 점심을 먹고 그나마 바람이 좀 부는 벤치로 나와 여유롭게 유투브를 본다. 잠시 후 젊은 아빠와 4살 정도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내가 앉은 벤치 한쪽 끝에 와서 앉는다. 아이 엄마는 쇼핑 중이고 그 동안 아빠가 아들과 놀아주는 걸로 보인다. 한창 뛰어 다닐 나이인 아이가 통로를 왔다갔다 뛰어 다니는 동안 아빠는 사람들이 지나갈 땐 뛰지 말라고 주의를 주면서 아이를 애정 가득한 눈으로 지켜 본다. 아빠가 같이 놀아 주기를 원하는 아이가 아빠에게 다가와 묻는다. "아빠는 왜 나랑 같이 안 뛰어?" 아빠의 대답이 놀랍다. "아빠는 에너지를 아껴 써야 돼. 지금 에너지를 다 쓰면 출근해서 일할 때 너무 힘들거든. 그래서 같이 계속 뛰어 다닐수가 없어. " 부라보~ 세상..

일상 이야기 2024.07.14

not bad

바람이 심한 토요일이다. 출근을 해서 열심히 오전 일을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어 잠시 벤치에 나와 앉아 있는 지금, 바람은 거세게 불고 있지만 히터에서 나오는 듯한 뜨뜻 미지근한 바람 같아 청량감은 없다. 흐린 하늘에 잔뜩 낀 구름들은 바람을 따라 빠르게 흘러 간다. 주말엔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 단위의 고객이 많은 편이라 여기저기에서 아기들의 우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공룡들을 보여 주기 위해 아빠는 어린 아들을 번쩍 들어 올리고, 입술에 피칠갑을 한 티라노사우르스를 가까이에서 본 아들은 울음을 터뜨린다. 아이가 놀라 우는 건 참으로 안타깝지만, 멀찍이 앉아 지켜 보는 입장은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아~ 덥고 끈적이고 시끄럽고 그러나, 나쁘지 않은 토요일.

일상 이야기 2024.07.06

여름감기

나는 오후 1시가 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 온다. 오늘의 도시락은 전주비빔밥과 천도 복숭아 두 알. 여름감기를 거하게 앓는 중이라 도시락에까지 신경이 써지질 않아서 쿠팡에서 파는 냉동 비빔밥을 전자렌지에 데워 왔다. 콧물이 줄줄, 잔 기침이 있고 입맛도 없지만 차 뒷 자리에 지친 몸을 누이고 꾸역꾸역 밥을 씹어 넘긴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감기에 걸리고 보니 만사가 무기력하다. 검은 색 모하비 한대가 내 차 옆으로 부드럽게 주차를 한다. 운전석에서 남자가 내려 트렁크를 열고 유모차를 꺼낸다. 조수석에서는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하얗고 귀여운 포메라니안을 안고 내린다. 강아지가 너무 이뻐서 나는 밥 숟가락을 내려 놓고 그들을 본다. 부부가 포메를 다루는 손길이 너무나 섬세하다. 남자는 ..

일상 이야기 2024.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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