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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해피엔딩

겨울비가 내리는 주말 저녁.아들아이가 차를 빌려간 바람에 집까지 20여분 정도를 걸어서 퇴근하는 길.비가 내리는 기온이라 아주 춥지는 않지만 그래도 11월 말일이니만큼 목덜미가 서늘해서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젖은 낙엽을 밟으며 타박타박 걷는다.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딸아이 전화다.친구가 놀러 와서 그러니 자기 집에 들러 강아지들을 좀 데려가 달라는 부탁 전화.딸아이집은 우리 집에서 1km쯤 떨어져 있으니 직장에서 집까지 걸어간 거리만큼을 또 걸어가야 하는데, 종일 일하고 퇴근하는 엄마 생각은 안 하는구나 싶은 게 한숨이 저절로 쉬어진다.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테니 일단 서운함은 접어두고, 딸아이 집을 향해 씩씩하게 또 걷는다.오랜만에 보는 딸아이 친구와 잠시 인사를 나누고 강아지들을 데리고 아파트..

일상 이야기 2024.12.01

트롤브루 자몽 맥주

퇴근 후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캔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준다. 집 앞 편의점에 들러 네 캔에 만 원짜리 맥주를 고르다가 트롤브루라는 낯선 맥주를 발견했다. 처음 보는 맥주나 와인을 고를 때 나는 그 상품의 디자인이나 그림을 보고 선택할 때가 종종 있는데 트롤브루 캔의 그림이 딱 그랬다. 트롤브루 자몽의 그림에는 파란 옷을 입은 트롤(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생물)들이 홉 열매가 주렁주렁 걸린 광산 안에서 곡괭이로 자몽을 캐내고 있는데, 루비자몽을 보석에 빗대어 착안한 신비스러운 그림인 듯하다. 맛은 탄산이 조금 섞인 자몽 주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알코올이 2.6% 라 그런지 술이라는 느낌은 거의 없고 개인적으로 은은한 자몽향과 약간 씁쓸하면서도 깔끔한 뒷맛이 좋다. 나는 딸아이가 만들어 ..

일상 이야기 2024.11.11

So happy

따뜻한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평화로운 휴일. 보글보글 끓인 된장찌개에 특별한 반찬 없이 밥 한 공기를 뚝딱 먹으면서 오늘은 식구들 이불을 좀 더 두꺼운 걸로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먼저 안방 침대 위 이불과 토퍼를 걷어내고 새 이불로 교체하는데, 콩이와 연이가 앞다투어 뛰어 들어와 새 이불 위에서 뒹굴거리기 시작한다. 늘상 있는 일이라 그러려니 하면서도 어쩜 저리 아이들과 하는 짓이 비슷할까 신기하게 느껴진다. 깨끗하게 빨래가 된 보송 거리는 이불을 좋아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동물들이 코를 비비며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며 좋아하는 모습은 볼 때마다 재밌다. 좀처럼 비켜주지 않는 콩이, 연이를 겨우 내려 보내고 안방 침구정리를 마저 끝냈다. 자고 있는 아들아이 방은 나중에 정리하기로 하고, ..

혜화역 1번 출구

결혼 전 직장동료로 만나 30여 년간 긴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두 친구가 있다. 점심약속을 하고 어디서 볼까 의논 끝에 오랜만에 혜화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낙엽 지는 마로니에 공원도 걷고 맛있는 점심도 먹기로 했다. 혜화역 1번 출구 앞.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그야말로 젊음의 거리 대학로.. 친구 하나가 조금 늦을 거 같단다. 먼저 만난 친구와 역 부근을 둘러보다가 액세서리를 파는 팬시점에 들어갔다. 가방에 달고 다닐 작은 천 원짜리 참장식을 하나 골랐더니 친구가 선물이라며 천 원을 대신 내준다. 아싸~ 득템^^ 친구가 사준 맘에 쏙 드는 선물. 친구 하나가 마저 도착했고 우리는 고민 끝에 점심메뉴를 닭갈비로 정했다. 모짜렐라 치즈와 우동사리가 듬뿍 들어간 철판 닭갈비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우리들은 붐비는..

일상 이야기 2024.11.03

직장을 옮겼다.

얼마 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집에 있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직장 내에서의 믿음과 유대감이 깨지면 그곳에서 계속 일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숲을 벗어나야 비로소 산 전체를 볼 수 있듯이 다니던 직장을 떠나고 보니 리더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미성숙한 한 사람이 일으키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 실감된다. 며칠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쉬었다. 며칠 쉰다고 아픈 몸이 회복되거나 바닥난 에너지가 만땅 충전되는 건 아니지만, 쇼파에 비스듬히 누워 강아지들을 쓰다듬거나 사랑스런 고양이와 잠깐씩 낮잠을 자는 것만으로도 디톡스가 되는 시간들이었다. 이틀 전, 새로운 직장으로 첫 출근을 했다. 내가 하게 될 일보다는 그곳의 사람들을 먼저 봤다. 내 경험으..

일상 이야기 2024.10.31

물구나무 서기

침대 위에 앉아 고양이 낚싯대로 희동이를 부른다. 낚싯대를 요란하게 흔들어 댈수록 희동이는 더 신이 나는 모양이다. 침대 아래 깔아 놓은 카펫 위를 우다다다 뛰어다니며 낚싯대 끝에 매달린 초록색 리본을 사냥하다가, 작고 하얀 발가락 사이에 리본이 걸려들면 보란 듯이 씩씩 거리며 침대 위로 물고 올라온다. 내가 앉은 발치에 그것을 당당히 내려놓고 나를 한번 보고 이빨자국 가득한 리본을 한번 보고 어서 낚싯대를 다시 던져보라고 무언의 재촉을 한다. 점점 두둑해지는 희동이의 폭신한 뱃살이 가쁘게 숨을 몰아 쉬다가, 충분히 놀았는지 아무렇게나 리본을 뱉어 놓고 언제 뛰어다녔냐는 듯 세상 편한 자세로 잠이 든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희동이의 감겨있는 갈색 속눈썹을 조용히 들여다보다가 문득 물구나무서기를 해보고..

무제

샤워를 하고 나와 큰 전신거울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다. 다들 이런 건지 내가 유난히 이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젖어 있는 무언가가 목에 닿는 걸 잘 못 견딘다. 꽤 어렸을 때의 기억 중 하나.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세수를 할 때 아빠가 옆에서 목도 깨끗이 닦아야 한다고 자상하게 알려줄 때에 나는 차마 거부할 수 없어 작은 손에 물을 묻혀가며 목을 닦곤 했는데, 수건으로 목의 물기를 닦아낸 뒤에도 남아있는 젖은 옷의 축축한 느낌이 너무 싫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젖은 머리가 반쯤은 말라야 그제서야 느끼는 안도감. 머리를 말리며 점점 횅~해지는 정수리 가르마를 거울 가까이서 바짝 들여다보다가 흰머리가 꽤 자랐다는 것을 인식한다. '우쒸.. 염색한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일상 이야기 2024.10.26

소년이 온다(한강)

얼마 전 소설가 한강이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로 2024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예전에 읽은 [채식주의자]의 강렬한 이미지로만 기억하고 있던 한강의 수상 소식에, [소년이 온다]가 너무 궁금해져서 바로 예약주문을 했었다. 어제 드디어 배송된 책. 책을 받으면 거의 당일에 읽기 시작해 길어야 이틀이면 다 읽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데, 이 책은 왠지 첫 장을 넘기지 못하고 하루를 꼬박 표지만 만지작 거리며 보냈다. 막연한 두려움.. 솔직히 5.18 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소설이라는 점에 살짝 겁이 났다. 불가피하게 서술될 수밖에 없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내용들을 읽어나갈 용기가 선뜻 생기질 않았달까. 나는 그 유명한 범죄도시 시리즈 한편도 보지 못할 만큼 폭력적이고 끔찍한 것들을 싫어한다. 그런 나에게는 글을..

카테고리 없음 2024.10.25

가을예찬

가을비가 내리는 평온한 화요일. 딸아이가 만들어 준 딤섬으로 맛있는 점심을 먹고 구수한 작두콩 차를 마신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짙은 갈색 차는 가을과 많이 닮아있다. 로즈메리오일을 서너 방울 떨어뜨린 오일버너에 초를 켜고 멀찍이 앉아 노랗게 반짝이는 촛불을 본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창밖의 잔뜩 흐린 회색 하늘과, 베란다 난간에 매달린 작은 빗방울들과,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거실을 돌아다니는 강아지들의 씰룩이는 엉덩이를 바라보는 지금. 완벽한 행복을 느끼는 시간이다.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이 고즈넉하고 아늑한 정서가 참 좋다. 이 가을이 오래 좀 머물러줬으면...

일상 이야기 2024.10.22

비우는 기쁨을 누리세요.

일 년에 서너 번, 옷들을 정리한다. 봄부터 최근까지 입었던 하절기 옷들을 집어넣고 가을부터 초겨울까지 입을 옷들을 꺼내는 과정인데 매번 한 보따리씩 버려도 또 그만큼의 버릴 옷들이 나온다. 나름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데도 이 모양이다. 워낙 옷을 좋아하는 데다가 예전에 옷가게를 오래 했던 탓에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변명을 하지만 사실 특별히 애정하는 옷 몇 가지 외에 오래된 옷들은 많지 않다. 옷을 정리하는 기준! 대체로 전문가들이 말하는 버릴지 말지의 기준은 " 2년 동안 안 입은 옷은 버려라." 든가 "설레지 않는 옷은 버려라."인데 나의 기준은 후자 쪽에 가깝다. 입고 싶은 기대감이 들지 않거나 입고서 불편했던 기억이 있으면 나는 과감하게 그 옷을 버린다. 사서 몇 번을 입었다는 횟..

일상 이야기 2024.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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