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나는 혼자 온 거야? "
민자 씨의 아들이 혼자 들어오는 둘째 누나를 보며 물었다. " 그래. 네 매형도 오늘 일이 늦게 끝난다고 그러고 애들도 바쁘다고 해서 말이지. 나도 사실 오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과장한테 양해를 구하고 겨우 왔다. "
" 형님~ 먼 길 오느라 애 쓰셨어용."
민자 씨의 며느리가 애교 섞인 인사를 건넸고 어쨌든 올 사람은 다 온 거니까 시작하자는 큰 사위의 말에 민자 씨의 아들이 성냥을 긋고 케잌에 꽂힌 초에 불을 붙였다.
" 여기 고기 좋다~ 큰 언니가 예약한 거지? "
막내딸이 묻고
" 응. 네 형부랑 전에 한번 왔었는데 괜찮길래~ 엄마도 소고기 좋아하니까.."
큰 딸이 대답했다.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며 평소에도 장난기가 많은 둘째가 말했다.
" 좋은 고기를 보니 눈물이 앞을 가리면서 우리 어릴 때 생각이 나네. 고기라고는 추석, 설날에 국에 들어간 거 말고는 구경 한 번을 못했잖아. 그래서 내가 이렇게 자라다 말았나 봐."
둘째의 말이 맛있게 고기를 씹고 있던 민자 씨의 심기를 건드렸다.
" 그때 고기 먹으면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됐겠냐? 엄마는 어려서도 산에서 나무 주워다 장에 나가서 팔고, 먹을 게 없어서 맨~ 감자 아니면 멀건 풀 죽이나 쑤어서 먹고 그렇게 배곯아가며 컸어. 그런 배 부른 소리는 하지도 마라! "
흥분한 민자 씨의 말에 둘째가 다시 입을 뗐다.
" 엄마는 이게 무슨 배부른 소리라고 그래? 솔직히 나 학교 다닐 때 친구들 도시락 보면 장조림에 달걀후라이 싸 오고 하다못해 어묵이나 멸치라도 볶아오고 그랬거든요? 우리나 일 년 내내 똑같은 김치만 싸가고 그랬던 거지. "
가만히 지고 있을 민자 씨가 아니었다.
" 야~ 그래서 엄마가 늬들을 굶겼어? 김치를 싸가든 뭘 싸가든 밥은 안 굶겼잖아! "
민자 씨의 높아진 언성에 모두들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 셋째가 말했다.
" 엄마도 참~ 언니가 그냥 옛날 얘기 좀 한 걸 갖고 뭘 흥분하고 그랴. 다들 진정 진정! "
머쓱해진 민자 씨가 집고 있던 소고기 한 점을 앞접시에 내려놓으며 헛기침을 할 때였다.
이번에는 큰 딸이 둘째의 바통을 이어 말했다.
" 사실 우리 집 형편이 그랬다기보다는 엄마가 너무 돈을 안 쓰신 건 맞지. 다들 새 옷 한 번을 제대로 입어 봤나, 분식점 지날 때마다 그렇게 먹고 싶던 떡볶이 사 먹을 용돈 한 번을 받아 봤나.."
큰 딸의 지적에 민자 씨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 내가 옷을 안 사줘서 니들 다 발가벗고 다녔어? 그리고 내가 왜 용돈을 안 줘? 용돈 다 줬잖아! "
자식 넷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자
민자 씨는 순간 혼란스러웠다.
내가 저 애들한테 용돈 한 번을 안줬었다구..?
그럼 학용품은 뭘로 사고, 그럼 버스비는 지들이 벌어서 썼다는 거야 뭐야? 요것들 봐라~
" 야! 그럼 학용품 사고 버스표 사고 그런 거 다 누구 돈이야? 엄마가 과일 장사 해서 준 거 그게 용돈이지 뭐가 용돈이야! "
자식들이 더 이상 반격 하기는 힘들 거라는 예상을 깨고 이번에는 셋째가 말했다.
" 엄마~ 그건 아니지. 엄마가 버스표 살 돈을 제때 안 줘서 나 고등학교 다닐 때 두 시간씩 걸어서 집에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구먼.. 학용품도 그래~ 엄마가 맨날 돈 없다고 하니까 필요한 게 있어도 말도 못 하고 안 가져가서 교실 뒤에서 벌 서고 그런 적도 많았단 말야. 글구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그땐 그렇다 치고 우리 애들 자랄 때도 엄마가 언제 과자 한 봉지라도 사 줘 본 적 있어? "
어릴 적부터 눈물이 많던 셋째 딸이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민자 씨의 머릿속은 안개에 휩싸이듯 뿌옇게 흐려졌다.
얘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민자 씨는 며느리가 따라 놓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 그래. 저것들이 내가 고생 고생 해가며 키워준 걸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딴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그만큼 했으면 됐지 뭘 더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거야? 이래서 자식 키워놔야 다 소용없다고들 하는 거지.'
할 만큼 했다는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민자 씨는 미간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지나간 날들을 되짚어 훑기 시작했다.
(마지막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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