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자 씨는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새끼들에게 넉넉히 차비를 쥐어 주고, 학교 끝나면 친구들하고 붕어빵이라도 사 먹으라며 얼마 안 되는 용돈이라도 쥐어 주고 명절을 앞두고는 새 옷은 못 사줄 망정 새 양말이라도 한 짝씩 사주는 자신의 모습을 소환해 내고 싶었다.
그러나 기억이 하나씩 떠오를수록 민자 씨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이들의 증언대로 그녀의 기억 속에도 너그러운 민자 씨는 존재하지 않았다. 스케치북을 사야 한다는 셋째의 말에 "언니한테 빌려서 가! "라고 말하는 무뚝뚝한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고, 소풍을 가는 아이들의 김밥 재료를 사면서 소시지를 집었다가 도로 내려놓는 소심한 모습이 떠올랐고, 과일장사를 하면서도 아이들에게는 늘 상품가치가 떨어진 시든 과일만 먹이는 인색한 자신의 모습이 기억났다.
이쯤 되자 민자 씨는 더 이상 옛 기억을 불러내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두려웠다.
이 아이들을 내가 어떻게 키운 거지?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가르치기 위해서 하루 종일 과일을 팔았는데,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한 거지...?
민자 씨는 들고 있던 물컵을 거칠게 상에 내려놓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묵하는 민자 씨를 지켜보고 있던 자식들이 일제히 민자 씨를 올려다보았다.
" 앞으로 내 생일 같은 거 챙기지 마. 먼저 일어날 테니 다들 천천히 먹고 가고... "
민자 씨가 미닫이 문을 열고 나가자 셋째 사위가 따라 나오며 민자 씨를 붙들었다.
" 아휴. 장모님~ 장모님 생신 자린데 이렇게 가시면 어떡해요. 저랑 다시 들어가세요. 네? "
민자 씨는 평소 살갑고 서글서글한 셋째 사위의 손을 조용히 뿌리치며 말했다.
" 아냐. 나 정말 배 부르고 피곤해서 그러네. 괜찮으니 자네 어서 들어가서 식사해. 나 천천히 소화도 시킬 겸 걸어갈게. "
집까지는 서너 정거장 정도를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택시라도 탈까 생각했다가 이내 걸어가기로 마음먹은 민자 씨는 자신이 왜 아이들을 그렇게 키울 수밖에 없었는지 해답을 찾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그놈의 돈 때문이었다.
돈이 아까워서 한창 크는 아이들의 키에 맞는 제대로 된 바지 한 장 사주지 못했고, 돈이 아까워서 애들 좋아하는 김치찌개에 돼지고기 한 번을 넣어 주지 못했고, 돈이 아까워서 사 달라는 물감 한번 제때 사주지 못했던 자신을 돌아봤다.
80이 다 된 나이에도 그놈의 돈이 아까워서 택시도 한번 못 타는 자신이 아닌가..
눈물이 주름진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도대체 그렇게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나는 무엇을 한 걸까..
첫째 딸 시집보낼 때 따뜻하고 좋은 이불 한 채 마련해주지 못할 정도로 수중에 돈이 없었던 건가.
교대에 들어가 선생님이 되고 싶다던 둘째에게 돈이 어딨어서 대학을 가냐고 말했던 그때의 나는 어떤 노력을 해 보기는 했었나?
셋째 딸이 첫 애 낳고 몸조리할 때에도 축하한다는 말은커녕 질 좋은 소고기 한근이라도 사다가 정성껏 미역국 한번 끓여 줘 보았던가.
생일만 해도 그랬다. 민자 씨 자신의 생일은 한 달 전부터 자식들에게 주입시키며 매번 챙겼지만, 정작 그녀는 자식들의 생일날을 단 한 번도 챙겨줘 본 적이 없었다.
민자 씨는 가로수 옆 벤치에 앉아 매고 있던 가방을 열고 둘둘 말아 놓은 휴지를 꺼냈다.
시원하게 코를 풀고 흐르는 눈물도 닦아냈다.
헛기침을 해서 목을 가다듬은 민자 씨가 마치 자식들이 앞에서 듣고 있기라도 하는 양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니들 아주 못된 것들이야! 엄마가 니들 키우면서 얼마나 쌔빠지게 고생을 했는데.. 엄마는 뭐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입고 싶은 거 다 사 입어 가면서 살았는 줄 알아? 니들 아빠 먼저 보내고 어떻게든 니들 데리고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그런 거야. 한 푼이라도 아끼고 저축해야 살 수 있으니까.. 그래야 나중에 니들 시집보내고 장가보낼 때 기죽지 않을 거니까..... 하이고.. 그러게. 왜 그때 쓰려고 악착 같이 모아둔 돈을 그때에도 쓰지를 못했나.. 미련곰탱이처럼 움켜쥐고만 있을 줄 알았지 정작 필요할 때는 아까워서 쓰지도 못했네. 그놈의 돈이 내 자식들보다 소중 했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안 됐다는 표정으로 민자 씨를 힐긋거렸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인가 봐라고 대 놓고 말하며 지나가는 젊은것들도 있었다.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름답고 푸른 여름을 지나오느라 지친 나뭇잎들이 그녀가 앉아있는 벤치 아래로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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