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34

여름과 가을 사이

폭염으로 꽤나 힘들었던 여름이었다. 과거형으로 말하기엔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이틀 전쯤부터 아침, 저녁으로 시원해지는 걸 보니 끈적이던 여름이 손 흔들며 저만치 떠나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계절이 바뀌기 시작할 때의 소소한 변화를 좋아한다. 예를 들면, 겨울이 시작될 때엔 낙엽이 타는 듯한 매캐한 냄새 같은 걸 느끼곤 하는데 나는 그걸 겨울의 냄새라고 믿는다. 어쩌면 먼 곳에서 그즈음 실제로 낙엽을 태우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해마다 그 냄새를 맡곤 한다. 계절이 바뀔 때는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의 각도가 달라지고 습도가 달라지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미세하게 달라진다. 불과 며칠 전까지도 들렸던 요란한 매미소리는 어느새 온데간데없고 풀벌레소리가 고요한 아파트 단지에 가득하다. 갱년기 불면증으로 쉽게 ..

일상 이야기 2024.08.29

말괄량이 삐삐

내가 초등학생 (그때는 국민학교) 일 때 kbs에서 말괄량이 삐삐라는 13부작 외화가 방영 됐다. 첫 회부터 삐삐롱스타킹에 매료된 나는 삐삐가 방송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삐삐의 광팬이었다. 너무 오래전에 본 거라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대략 설명을 하자면 삐삐의 붉은색 머리카락은 양갈래로 땋아져 양쪽으로 뻗어 있고 장난기 가득한 귀여운 얼굴은 온통 까만 주근깨로 덮여 있었다. 삐삐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원숭이와 달마시안 같이 점박이가 있는 하얀 말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천을 잘라 옷을 만들어 입거나 요리를 직접 하기도 하고, 금화가 가득 들어 있는 큰 가방을 가지고 다녔다. 해적인 삐삐의 아빠는 바다에 나가 실종 됐는데 거의 마지막쯤에 아빠를 만났던 걸로 기억된다. 사탕가게 앞에서 군침을 흘..

일상 이야기 2024.08.14

안녕, 오벳?

2년전쯤 구제 의류를 분류하고 포장하는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일을 하게 된 이유는 전에 해보지 않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어서였는데, 일본에서 수입해 온 구제의류(중고의류)를 종류별, 등급별로 나누어 다림질을 하고 가격표를 붙여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다시 판매하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헌옷들을 만지는 일이다보니 기본적으로 깨끗한 환경이 아니었고 커다란 컨테이너 박스가 작업장이라서 거의 바깥의 기온과 차이가 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해야했다. 사업장은 꽤 커서 사장을 제외한 직원이 10명 정도 됐는데, 외국인 두 명이 포함 되어 있었다. 힘을 써야 하는 일들을 거의 도맡아 하던 오벳이라는 청년은 서아프리카의 가나에서 온 30대 중반의 성실하고 조용한 친구였는데, 한국말이 서툴렀지만 나와는 ..

일상 이야기 2024.08.10

지금은~

휴가철의 절정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아울렛은 피서를 떠나기 전 위시 리스트를 충족 시키려는 사람들로 연일 북적인다. 전월 대비 매출이 크게 상승하고 일의 강도도 그에 비례 하고 있다. 주어진 급여의 월급쟁이들은 이런 매출상승이 그닥 달갑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지만, 한가로운 날들도 있었으니 비지땀 흘려가며 일에 몰두 해야 할 시간 또한 불가피하다. 나도 예전에는 휴가철인 이 때를 손꼽아 기다리고, 빠뜨린 것이 없는지 메모지를 체크 해가며 여행 가방을 싸고, 차가 밀릴 시간을 피한답시고 이른 아침부터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워 푸른 바다가 있는 피서지로 떠나곤 했다. 맨발로 디딜수도 없는 뜨거운 모래사장에 텐트를 치고 보글보글 캠핑찌게를 끓이고 코펠에 지은 설익은 밥을 먹으면서도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물에서..

일상 이야기 2024.08.06

거미꿈

나는 잠을 자는 동안 계속 꿈을 꾸고 아침에 깨어나서도 간밤의 꿈들을 거의 기억 한다. 그만큼 숙면 하지 못해 피로가 쌓이기는 하지만, 신비로운 꿈도 많이 꾸기 때문에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재밌는 영상을 보는 느낌이 들 때도 많다. 어젯밤에는 내 방 사방에 거미줄이 처지고 큰 거미들이 벽마다 붙어 버티고 있는 꿈을 꾸었다. 거미가 지키고 있는 방문을 지나는 게 무서워서 방 밖으로 나가질 못하고 덜덜 떠는 요상한 꿈이었다. 꿈을 많이 꾸다 보니 확률상 예지몽을 꾸는 경우도 많다. 꿈에서 일어난 일들이 현실에 일어나는 경험을 여러번 했다. 그런 일이 생길때면, 이러다가 신내림이라도 받게 되는 거 아닌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대수롭지 않은 수준의 예지몽들이다. 거미줄과 거미의 꿈은 무슨 의미일까..

일상 이야기 2024.07.26

휴일 즐기기

평소 퇴근시간이 늦다보니 강아지들 산책 시키기가 쉽지 않다. 가방만 내려 놓고 바로 콩이,연이를 데리고 나갔다 오리라 결심 했다가도 집에 들어서면 얼른 씻고 쉬어야겠다는 생각 뿐.. 오늘같은 휴일에 산책을 충분히 시켜야 하는데 오전부터 종일 비가 오락가락이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어제 다이소에서 사 온 미술도구를 꺼낸다. 여태는 색연필과 아크릴 물감으로만 그림을 그렸는데 어제는 문득 파스텔 크레파스를 사고 싶었다. 어릴 때 미술시간에 써본 이후로 몇 십년만에 다시 만져보는 크레파스다. 내가 산 건 오일파스텔이라고 쓰여 있는데 검색해보니 고급 크레파스라고 하며 이름처럼 찰지고 오일리한 느낌이 강하다. 찐득한 크레파스 가루가 식탁 위에 묻고, 마시고 있는 커피잔 손잡이에 들러 붙고 난장판이지만 오히려 재..

일상 이야기 2024.07.23

happiness

빗방울이 약하게 떨어지는 토요일의 점심시간.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마신다. 장마는 잠시 소강 상태였다가 오후부터 다시 비가 예보되어 있다. 며칠간 흠뻑 비를 맞은 싱그러운 나무들은 살랑이는 바람에 기분 좋은 듯 잎을 흔들고 힙한 음악이 아울렛을 가득 울린다. 카메라를 켜게 만드는 예쁜 조경 사이를 걸으며 여유롭게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 신이 난 아이들을 태우고 천천히 다리를 건너는 알록달록 꼬마기차. 십수년의 유충생활을 청산하고 깨어난 매미들의 우렁찬 합창. 일로 치면 평소의 몇 배로 바쁘지만, 활력 넘치는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즐거운 토요일이다.

일상 이야기 2024.07.20

Rain

장맛비가 무섭게 퍼붓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잘 때처럼 행복할 때가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해가 쨍한 날보다 비나 눈이 내리거나 흐린 날씨를 좋아합니다. 밤새 비가 꽤나 내리는 거 같았습니다. 천둥소리를 무서워하는 우리집 강아지 연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저는 아침까지 과격한 빗소리를 들을수 있어 참 좋더군요. 출근 길.. 역시나 비가 옵니다. 와이퍼가 지나간 자리에 일렁이는 파도를 닮은 빗물이 있어 핸드폰으로 찍어 봅니다. 이틀을 쉬고 나서 출근하려니 몸도 맘도 찌뿌둥 하지만, 오늘도 씩씩하게 일하러 갑니다.

일상 이야기 2024.07.17

저는 괜찮을까요?

나는 휴무일에 병원 통증의학과에 들러 의사의 진료를 받고 도수치료도 받는다. 30대의 친절한 남자 도수치료사에게서 한시간 동안 치료를 받는데, 1:1로 받는 길다면 긴 시간이다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내가 치료사의 엄마와 비슷한 나잇대라고 하더니 그래서 그런지 결혼 3년차의 가장으로서 궁금한 사적인 것들을 내게 묻기도 한다. 질문을 받으면 내 생각을 조심스럽게 얘기 해주는데 치료사쌤의 리액션이 넘 좋다보니 더 신이 나서 자꾸 주절 거리게 된다. 오늘의 주된 대화는 크게 두가지 였는데, 하나는 치료사가 치료를 하면서 여기는 어느 부위이고 어떤 기능을 합니다~ 등의 설명을 해 주는것이 환자 입장에서 볼때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되느냐 하는 다소 의례적인 질문이었다. "몰랐던 몸의 구조나 기능을 ..

일상 이야기 2024.07.15

내 안에 상어 있다~

유투브를 보다가 "대화의 밀도" 라는 책에 대하여 알게 됐다. 대화를 상어식 대화와 고래식 대화로 나누어 설명하는 내용이 있는데 흥미롭다. "상어식 대화는 초반부터 날카롭게 파고 들어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고 평소 별로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자기와 다른 주장을 펼치는 먹잇감을 포착한 다음, 비교하고 핀잔을 주고 대놓고 공격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낸다. 고래식 대화법을 구사하는 사람은 이와 다르다.자연스럽게 대화에 어울려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호응하며 경청하는 와중에 필요할때는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고래식 대화는 단단한 자존감과 절제된 에고(ego)가 전제되어 있기에, 이들은 상대를 위협하거나 무시하거나 비교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고 상대와 정서를 나눈다..

일상 이야기 2024.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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