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5월쯤인가 갑자기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더랬다.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들을 보다가 문득 그것들을 그려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일어났다.
나는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 했을 때 미루는 성격이 못된다. 바로 일어나 다이소로 뛰어 가서 스케치북과 아크릴 물감, 수채화 물감, 여러 사이즈의 붓들, 4B연필, 지우개, 색연필, 연필깎이, 다양한 사이즈의 캔버스를 한 보따리 사들고 왔다.
나는 다소 충동적인 성격인 반면 계획적이지는 못하다. 무얼 어디에 그리고 색칠은 무엇으로 할지 피사체의 크기는 어느 정도가 좋을지 그런 계산은 1도 하지 못한다. 일단 연필을 들고 망설임 없이 선을 긋고 바로 색을 칠한다.
제일 처음 그린 건 사과였다.
마침 집에 있던 딸아이와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서 각자 사과를 그리기 시작했다.
딸아이는 내 그림을 힐긋 거리고 나는 딸아이의 그림을 힐긋 거리며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사진 속에 있는 빨간 사과를 그려 나갔다.
처음에는 이게 사과여~ 실뭉치여~ 했던 것이 색을 입히고 명암을 주기 시작하면서 점점 사진 속 사과와 닮아 갔다. 신기하게도 딸아이가 그린 사과는 햇사과처럼 싱싱하게 보였고 내가 그린 사과는 이상하게 시들어 보였다. 그림안에 그린 사람의 나이가 자동으로 반영되나 싶어 재밌었다.
딸아이의 사과그림을 작은 액자에 넣어 선물로 주고 나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보통 하루에 스케치북 한두장, 시간이 많은 날은 서너 장씩 그림을 그려 댔다.
내가 그린 어설픈 그림들이 한장씩 늘어 가는 것이 너무 좋았다.
다만 다이소에서 산 색연필의 발색이 맘에 들지 않아 비싼 전문가용 색연필을 주문했고 좋은 물감과 붓도 함께 주문 했다. 20매짜리 스케치북이 금새 그림으로 채워 지고 며칠에 한번씩은 지난 그림들을 넘겨 보는 즐거움도 컸다.
거실과 내 방 벽은 온통 꼭꼬핀에 걸린 캔버스 그림들이 걸리고 다행히 가족들은 자아도취에 빠진 나를 조용히 지켜 봐 주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들어 그림을 안 그린지 꽤 된거 같다.
쓰던 물감이 다 떨어져서 새로 주문 한다는 것이 이렇게 공백이 길어졌다.
그림을 그릴 때 느끼는 행복은 지금처럼 글을 쓸 때와 비슷한 정도의 행복감이다.
완성된 그림이 마를 동안 물감이 묻은 붓을 세척 할 때의 그 성취감도 대단하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내 그림 속에 차곡차곡 담긴다.
내가 조합한 나만의 컬러로, 내 상상이 만들어 낸 배경 속에 그것들이 담겨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100세 시대를 어차피 살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멋진 목표 하나를 세워 볼까 한다.
내가 100세가 되는 해의 5월 어느 날.
소박하게 그림 전시회를 열어 보는 건 어떨까.
장미꽃이 예쁘게 핀 아담한 정원이 있는 카페라도 하나 빌려서 나이 백살이 될 동안 내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모두 초대 하고 싶다. 화가 퍼포먼스로 귀여운 빵떡모자라도 하나 사서 쓰고, 카페 입구에 정정하게 서서 나를 보러 와 준 손님들과 일일이 악수 하며 안부도 묻고, 카페 안에 걸린 내 그림에 관심 갖는 지인이 혹시라도 있다면 기꺼운 마음으로 그림을 떼어 선물도 하면서, 그렇게 딱 하루만 내가 그린 그림을 선 보이고 싶다. 어쩌면 그때쯤엔 너무 오래되어 바래졌거나 곰팡이가 피어나 있을지도 모르지만, 바래면 바래진대로 곰팡이가 피었으면 핀 대로 보여주고 싶다.
내일은 색연필로라도 그림 하나를 꼭 그려야겠다. 오십여년 뒤에(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다는 가정하에) 나만의 그림 전시회에 걸어 놓을 따뜻하고 좋은 그림을...
'일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 우리 여행 갈래? (0) | 2024.07.05 |
---|---|
나의 소울 푸드 (0) | 2024.07.02 |
여름감기 (0) | 2024.06.28 |
소풍 (2) | 2024.06.22 |
진짜 여름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0) | 2024.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