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야기

진짜 여름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롤리팝귀걸이 2024. 6. 20. 16:19
반응형

아들 아이가 차를 빌려가서 이틀째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한다. 버스를 안 타본지 이삼년은 된 거 같다. 일단 핸드폰 뒷면에 꽂혀 있는 카드가 후불 교통카드인지 확인을 하고 챙 모자를 챙겨들고 집을 나선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6월 중순의 더위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뜨거운 햇살이 내리 꽂힌다. 버스가 도착하려면 6분이나 남았다.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 옆에 있는 상점들을 천천히 둘러 본다. 호두과자 집, 핸드폰 가게, 복권판매점, 커피숍, 과일가게.
과일 가게 좌판에 나와 있는 저 과일들은 과연 안녕한걸까? 덜 자란듯 알이 작은 대석자두와 천도 복숭아가 달궈진 에어프라이어에 들어가 있는 고통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닌지 사뭇 궁금 하다.
버스를 탄다. 내리기 편하게 뒷문 바로 앞 자리에 앉으려다가 멈칫 하고 다른 자리로 가 앉았다.
노.약.자.석
아직은 오십 중후반인 나를 노약자석에 앉히고 싶진 않다. 그것은 일말의 자존심 같은 거라고 말할수 있다. 아직 늙고 약한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
자차로  가면 15분이면 갈 거리를 버스는 30분이 넘게 달리고 있다. 숲속길 마을이라는 예쁜 이름의 정류장에 차가 멈추고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버스에 올랐다. 아~어제도 이 시간에 나와 같은 버스를 탔던 사람이지. 어제 그녀를 보았을때  그녀는 버스 정류장을 5미터 정도 앞두고 양산을 받쳐들고 걸어 가고 있었다. 기사님이 가볍게 클랙션을 빵빵 울렸고 그녀가 뒤를 돌아 봤다. 어깨를 덮는 기장의 풍성하고 정돈된 머리. 소매 부분에  레이스가 장식된 고급스런 밤색 블라우스. 깨끗하고 자연스런(성형의 흔적이 없는) 예쁜 얼굴.
그녀가 인상에 남았던 이유가 있다.
클랙션 소리를 듣고 버스에 오른 그녀는 무척이나 정중하게 깊히 고개를 숙여 버스의 도착을 알려준 기사에게 인사를 했었다. 마치 신랑감의 부모님께 처음 인사를 드리는 참한 아가씨처럼.. 의자 세 개를 사이에 두고 내 앞에 앉은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뒷모습에서도  품위가 느껴졌다. 허리를 곧게 펴고 앉은 반듯한 자세. 이어폰을 귀로 가져가는 길고 하얀 손.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치장되지 않은 정갈한 손톱. 그녀와 나는 같은 정류장에 내렸다.
나는 일을 하러 가는 아울렛이지만, 그녀는 쇼핑을 가는 걸거야.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놓고 남편의 와이셔츠를 사러 가거나 친구들과 브런치를 먹고 명품관을 둘러 볼수도 있겠지. 어쩌면 내가 있는 매장에서 손님으로 그녀를 다시 볼지도 모르겠는데?

이번 정류장은 숲속길 마을 입니다.
24시간 동안 잊혀 졌던 그녀가 오늘도 버스를 탄다.
어제와 똑같은 옷, 같은 헤어 스타일을 한 그녀가 천천히 걸어와 바로 내  앞자리에 앉는다.
가까워진 그녀의 뒷모습을 자세히 본다.
늦잠이라도 잔걸까?
어제의 단정했던 머리는 온데간데 없고, 뻗치고 부분적으로 엉키기까지한 그녀의 머리카락을 본다. 면이 섞인 밤색 블라우스에 하얀 개털이 몇가닥 들러 붙어 있는 걸  보자 그녀가 친근하게 느껴진다.
쇼핑을 가는것이 아니라 아침마다 버스로 출근하는 아울렛 직원일 확률이 높다.
각  잡혀 보였던 그녀가 갑자기 편안하게 보인다.
우리는 같은 정류장에 내린다.
양산을 꺼내 들고 우아하게 아울렛 쪽으로 걸어 가는 그녀에게 맘 속으로 인삿말을 전한다.
오늘도 힘 냅시다. 파이팅~


'일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의 그림 전시회에 당신을 초대 합니다.  (2) 2024.07.01
여름감기  (0) 2024.06.28
소풍  (2) 2024.06.22
그 곳은 어떠니?  (2) 2024.06.16
2015년 늦가을의 일기  (2) 2024.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