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하고 나와 큰 전신거울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다.
다들 이런 건지 내가 유난히 이런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젖어 있는 무언가가 목에 닿는 걸 잘 못 견딘다.
꽤 어렸을 때의 기억 중 하나.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세수를 할 때 아빠가 옆에서 목도 깨끗이 닦아야 한다고 자상하게 알려줄 때에 나는 차마 거부할 수 없어 작은 손에 물을 묻혀가며 목을 닦곤 했는데, 수건으로 목의 물기를 닦아낸 뒤에도 남아있는 젖은 옷의 축축한 느낌이 너무 싫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젖은 머리가 반쯤은 말라야 그제서야 느끼는 안도감.
머리를 말리며 점점 횅~해지는 정수리 가르마를 거울 가까이서 바짝 들여다보다가 흰머리가 꽤 자랐다는 것을 인식한다.
'우쒸.. 염색한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진한 커피 한잔을 내려 마시고 강아지들 산책용 가방을 크로스로 매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큰길 횡단보도를 건너 몇 달 전부터 단골이 되어버린 집 근처 미용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간다.
딸랑거리는 방울소리를 듣고 카운터에 앉아있던 원장이 밝게 인사를 한다.
"염색 좀 하려구요~ 흰머리가 그새 꽤 자랐어요."
세련된 내 또래의 원장이 웃으며 말한다.
"오신 지 한 달 반은 넘었으니 할 때가 됐지요."
권하는 자리에 앉아 가만히 기억을 해보니 미용실에 다녀간 지 정확히 한 달 반이 됐다.
자연스런 갈색으로 뿌리염색을 해주면서 원장이 말한다.
"김수미 씨가 돌아가셨대요. 아세요?"
안 그래도 오전에 딸아이를 통해 듣고 검색을 해 본 뒤라서 나는 작게 한숨을 폭~내쉬며 "그러게요..."라고 대답한다.
"활동도 많이 하고 연세도 그리 많지는 않던데 안 됐어요."
원장이 말한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나는 살고 죽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다.
2009년 마이클잭슨이 사망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나는 꽤 큰 충격을 받았었다.
나의 학창 시절에서 마이클잭슨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의 노래 중에 내가 모르는 노래가 과연 있을까라는 프라이드를 가질 정도로 나는 마이클잭슨의 찐 팬이었다.
그가 죽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나는 요즘의 가짜뉴스 찌라시 따위가 아닐까 의심을 했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 죽었고,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걸 내가 잠시 망각했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일용엄니도 그 순리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안타깝지만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삶의 순리..
뜬금없이 원장이 말한다.
"안락사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네요. 우리나라도 그게 허용되면 좋을 텐데.."
사람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호감을 갖게 마련이다. 나는 흐물거리던 자세를 곧추 세우고 "어머나~저랑 같은 생각을 하시네요!"
라고 말했다.
갱년기 증세인지 오랜 노동의 강도 때문인지 알 수 없는 길고 깊은 통증의 시간들을 견디면서, 내가 노인으로서 겪게 될 더 큰 고통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치유될 수 없는 고통과의 오랜 싸움을 해야 할 때가 온다면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내 삶을 정리하고 싶다. 삶을 정리하고 싶을 정도의 큰 신체적 고통이 어떤 것일지 지금은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정말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의 치유될 수 없는 괴로움이 찾아온다면 나는 꿋꿋이 그것을 참아내고 싶지는 않다.
나 스스로 나의 삶에 종지부를 찍는 것.
내 인생의 마지막 결정을 의사나 가족이 아닌 내 자신이 내리는 것.
그것은 내가 내 몸의 주인으로서 내리는 당연한 선택이며 순리일 거라고 생각한다.
솜씨 좋은 원장의 손을 빌어 염색이 된 푸석거리는 반곱슬 머리를 단정하게 가라앉힌 나는 결제한 카드를 받아 들며 말한다.
"다음에 올 때는 겨울이겠네요~"
원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한다.
"어? 정말 그렇겠네요~ 조심히 가세요."
미용실에 앉아있던 두 시간 동안 거리의 공기는 차가워져서, 달랑 한 겹 입고 나온 오트밀색 맨투맨 티셔츠가 얇게 느껴진다.
팔짱을 끼고 종종걸음으로 아까 건넜던 횡단보도를 다시 건넌다.
낯설게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달콤한 코코넛 냄새에 섞여있는 차가운 공기의 냄새...
겨울이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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