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가 내리는 주말 저녁.
아들아이가 차를 빌려간 바람에 집까지 20여분 정도를 걸어서 퇴근하는 길.
비가 내리는 기온이라 아주 춥지는 않지만 그래도 11월 말일이니만큼 목덜미가 서늘해서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젖은 낙엽을 밟으며 타박타박 걷는다.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
딸아이 전화다.
친구가 놀러 와서 그러니 자기 집에 들러 강아지들을 좀 데려가 달라는 부탁 전화.
딸아이집은 우리 집에서 1km쯤 떨어져 있으니 직장에서 집까지 걸어간 거리만큼을 또 걸어가야 하는데, 종일 일하고 퇴근하는 엄마 생각은 안 하는구나 싶은 게 한숨이 저절로 쉬어진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테니 일단 서운함은 접어두고, 딸아이 집을 향해 씩씩하게 또 걷는다.
오랜만에 보는 딸아이 친구와 잠시 인사를 나누고 강아지들을 데리고 아파트를 나온다.
걷는 걸 좋아하는 콩이는 앞서 걷지만, 엄살이 많은 연이는 역시나 젖어있는 콘크리트 바닥이 싫어 한걸음도 떼지 않는다.
말 안 듣는 어린아이 같은 연이를 번쩍 안아 든다.
어르고 달래 걷게 할 시간에 들쳐 안고서라도 최대한 빨리~~ 나는 집에 가고 싶다구!!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콩이는 가는 길목마다 들러 킁킁 냄새를 맡느라 바쁘고 연이는 우아하게 내 품에 안겨 지나가는 사람들을 감상한다.
'집에 도착하면 따뜻한 물로 콩이 발을 먼저 씻기고, 얼마 전에 담근 맛있는 총각무 김치에 저녁을 먹고, 종일 히터 바람에 건조해진 얼굴에 모델링팩이라도 좀 해야지..'
팔은 뻐근해오고 발은 점점 느려지고 머릿속은 해야 할 일들로 꽉 찬다.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
강아지들을 맡겨서 미안하다는 딸아이의 문자일까..?
아님 걸어가게 해서 미안하다는 아들아이 문자일까.
양손을 쓸 수 없으니 집에 가서 확인하기로 한다.
어깨가 빠지기 직전. 겨우 현관문을 열고 강아지들을 내려놓는다.
둔한 겉옷을 벗고 계획했던 대로 콩이의 젖은 발을 따뜻한 물로 씻긴다.
그다음은 맛있는 총각무 김치에 따끈한 밥이던가?
그러나.. 밥이 하나도 없다!
쌀을 씻는다. 불리고 말고 할 시간 따윈 없다.
밥솥에 밥을 안친다.
쿠쿠가 맛있는 취사를 시작하고 나는 식탁 의자에 털썩 앉는다.
핸드폰의 문자를 확인한다.
아이들의 문자가 아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멘트와 함께 보내온 11월 월급 입금문자다.
꺄오~ 이직한 새 직장에서의 첫 월급이 들어왔다.
지쳐있던 세포들이 일제히 건강하게 깨어나는 기분이다.
힘들었던 하루였지만, 오늘도 역시나 해피엔딩^^
엄살쟁이 연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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